내 가장 오래 된 기억이라 하면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 정확하게 몇살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대략 다섯 살 쯤인 것같다.
왜냐하면 여섯 살에 광주 소화유치원에 다녔던 기억은 꽤 또렷하게 남아있는 편인데 그 이전에 유치원도 다니기 전의
기억이 있기 때문에 그 기억이 다섯 살 쯤이 아닌가추측한다.
광주에서 태어났고, 광주에서 열 일곱 살 여름까지 살았으며 지금 서른 네살이라 광주와 서울에서 각 17년씩 산것이니
딱 반반씩 산 것인데 왜 서울과 광주의 느낌은 이렇게도 다른 걸까.
아마도 광주는 내 학창시절과 오래 된 추억들, 할머니와 고모들, 명절의 느낌같은게 복합적으로 남아있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기억이기 때문에 더 애틋한 것 같다.
앞으로도 많은 시간을 서울에서 보낼텐데 20년, 30년을 산다한들 광주처럼 정이 들지는 않을 것 같다.
스무살 무렵에는 시간도 많아서 1년에 한번씩은 광주에 내려가 친구들도 만나고 고모님들도 뵙고 그랬는데
나이가 들고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나니 고향에 내려가기는 너무나 힘들다.
기껏해봐야 추석을 앞두고 벌초를 하기 위해서 내려가는 건데 산소가 광주에 있는 것도 아니니 광주는 그저 잠시 잠깐
들러갔을 뿐이다. 광주 터미널에서 화순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화순에서 사평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사평에서 택시를 타던지 아니면 복교를 지나가는 버스를 타고 복교쯤 왔을 때 내려서 벌초를 하고...
그럴 때마다 지나가는 곳이 내 머릿 속 최초의 추억의 장소인 광주시 동구 소태동...
십여년을 늘 지나다니던 그 길.
늘 마음 속으로 다시 와야지하고 생각만 하던 그 동네를 올 해 추석이 지난 후에 다녀왔다.
그동안 아예 안갔던 것은 아니라서 광주가 많이 변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번에 가보니 너무나 많이 변해서 조금은 위화감이 들 정도였다.
친구들이랑 열심히도 다녔던 양영학원 앞 학원가는 완전히 갈아 엎어 문화공원(?)을 만든다고 한다.
도청앞 분수대까지 모조리 공사 범위였다.
친구들이랑 다녔던 비바오락실, 신성오락실, 코바오락실, 모나코오락실과 더불어 상추튀김을 팔던 분식집.
돈이 없어 남자 여섯명이가서 제육볶음 하나 시켜 놓고 소주 한잔을 마셔야만 고기 한점을 먹을 수 있었던 호프집.
새벽까지 커피 한잔 시켜놓고 가게에 비치 된 식빵을 모조리 토스트로 구워먹었던 커피 한잔에 2000원이었던 커피숍도
모조리 사라졌다.
아버지가 원장으로 일하셨던 대성학원은 건너편에 크게 새로 지어졌다.
동부한림학원은 사라진 듯... 일요일마다 학원에가서 아버지랑 목욕을 하고 갈비를 먹었던 기억은 평생 잊지 못하겠지.
도청앞 분수대에는 뭔가 예술적인 조형들이 올라가있고 도청은 가림막에 가리워져 있다.
발전도 좋지만 도청같은 역사적 건물은 손대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침 추억의 7080축제를 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앞으로 3,40년을 더 살면 추억의 2000,2010 축제 같은 것도 하겠지..?
예전엔 광주 교통의 요충지였던 도청앞이 공사중이라 이렇게 걸어가서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광주를 지키고 민주주의를 지키고 도청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라도 도청만은 손대지 말기를...
예전엔 한옥집 비스무리 했던 친구집이 이렇게 원룸으로 변했다.
친구녀석 부모님께서 운영하신다고 한다. '명주 하이빌'의 '명주'는 친구와 친구 여동생 이름의 앞글자를
하나씩 따온 이름이다.
내려간 첫날 친구들과 술을 한잔 마시고 다음 날 일찌감치 소태동에 다녀왔다.
내가 다녔던 광주 남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지만.). 어릴 때 살던 2층집, 국민학교 2학년 때 이사갔던 수정맨션까지.
전혀 몰라보게 변한 내 학교.
저런건물은 도대체 언제 들어선 건지...
지금은 예전의 가게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새로운 가게로 변했다.
'조은정보기술'이란 곳은 예전에 문구와 불량식품을 같이 팔던 작은 구멍가게였고 오른쪽의 피아노학원은
'오뚜기문구사'였다. 오뚜기 문구사에는 별로 안 좋은 기억이 있지만...
이 문구사는 아직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다.
국민학교 다닐 당시에 친구네 부모님께서 운영하셨던 곳인데 사진을 찍으며 얼핏 보니 머리가 하얗게 새신
친구 어머님이 앉아 계셨다.
흙바닥 이었던 운동장이 인조잔디와 트랙을 깐 멋진 운동장으로 변했다.
4학년 체육시간에 친구들이 응원하던 가운데 남학생 둘 씩 나와 씨름을 하던 모래밭은 없어졌다.
거의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건물..
지금은 휑하지만 원래 재래식 화장실과 수돗가, 많은 벤치와 탁자들이 있었던 곳이다. 수돗가에서 물총에 물을 넣고
벤치사이를 뛰어다니며 친구들과 물총놀이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친구가 있던 자리가 원래 여기였던가?
원래는 연못과 새장이 있어 자연시간엔 소금쟁이, 지렁이를 잡고 물방개와 닭, 오골계를 관찰했던 곳이 급식실로 변했다.
그대로 뒀으면 아이들에게 축소된 생태공원이었을 텐데 아쉽다.
이 조각상들은 아직도 있다.
위의 사자와 호랑이는 원래 녹색이었는데 나중에 색을 입혔나 보다.
색이 곳곳에 벗겨져있다.
이순신 동상...
3학년때였나 4학년 때 동상 밑 구멍에 손을 넣으면 손이 잘린다는 전설(?)이 있던 동상이다.
방과 후에 친구들이 이순신 동상아래 바글바글 모여 서로 누구 손이 잘렸다더라 하는 건너건너의 이야기들을 하곤 했다.
가끔 있었던 야외 수업은 늘 이곳에서 했다.
선생님께서 교과서 들고 등나무 밑으로 가자고 하면 이 곳에 친한 친구들끼리 둘러 앉아 수업을 받았다.
왼쪽의 '풀하우스'는 현대문구, 오른쪽의 바른손은 '우등사'라는 문구점이었다.
별나게 문구사가 많은 동네였다.
특히 '우등사'는 할머니 살아계실 적에 장난감을 갖고 싶어하는 손자에게 할머니께서 외상으로 장난감을 사주셨던 문구사다.
'우등사'의 사장님 사모님께서 계셨다면 인사를 드리고 싶었지만 아마도 이제 두분 모두 연세가 굉장히 많으셔서
살아계신다해도 가게 운영은 안하실 듯 하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닐 당시에는 '우등사'였고 중학교 다니다가 서울로 이사를 올 때쯤엔 화장품 가게였는데
지금은 바른손 팬시&스넥이 됐다.
여기서 정말 장난감 무지하게 샀다. G.I. 유격대, 공룡인형, 100원짜리 조립식 로보트, 3천원짜리 태권V,
둘째누나가 태권도장 땡땡이 치는거 입막음하는 대신 사준 스타에이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결국 관장님한테 사실대로 얘기하는 바람에 누나는 잡혀왔지만............
쥐포 자판기도 있어서 50원넣고 초록버튼을 누르면 약간 덜 구운 쥐포, 빨간 버튼을누르면 바짝 구은 쥐포가 나왔다.
큰 누나가 500원 주면서 10마리 사오라고 심부름 시켜서 신나게 뽑아갔던 기억이 난다.
이 골목은 아마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이라고 기억한다.
왼쪽의 코카콜라 매장이나 오른쪽의 진성회관이나 둘 다 슈퍼마켓이었고..........
늦은 저녁 아버지께서 목마를 태워주셨고.............
사진 상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아버지 목마를 타고 가면서 밤하늘을 봤는데 초승달과 수 많은 별이 보였다.
내가 그 초승달을 가리키면서 "손톱달이다."라고 외쳤고 그 소리에 아버지와 옆에 계시던 어머니, 누나들이 다 같이 웃었던
기억이 있다.
나보다 한두살 정도 많았던 범종이 형네 집.
우리는 밤종이 형이라고 부르면서 놀렸지..
내 기억속 최초의 우리 집.
어떻게 이렇게 변한게 하나도 없는지.. 맘 같아선 대문 열고 들어가 구석 구석 사진을 찍고 싶었다.
이 집 바로 옆은 민숙이랑 민숙이 여동생...(이름이 민정이였나 민경이였나..) 이 살았었고 맞은 편에는 영태 형이 살았었는데
사진은 찍지 않았다.
국민학교 2학년때 이사간 수정맨션 가는 길.
위태로웠던 철다리들이 전부 깨끗한 나무 다리로 바뀌었다.
수정맨션으로 가려면 다리를 두개 건너야 되는데 다리 하나를 없애고 막혔던 길을 뚫어 하나의 다리로도 왕래가 가능하도록
되었다.
성당다닐 때 봉사 다녔던 행복재활원도 그대로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처음엔 들어가기가 꺼려졌지만 여기까지 와서 들어가보지도 않을 수는 없어 관리실 아저씨께
예전에 살던 사람이라며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는데 그 관리실 아저씨 조차 예전에 계셨던 그 분이다.
물론 그분은 날 기억 못하셨지만 이야기 중 아버지에 관한 얘기를 하니 아버지는 기억하고 계셨다.
하긴... 내가 이곳을 떠날 땐 아직 어린 학생이었으니 날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도 당연하다.
원래 닭장이었는데 창고로 개조가 됐다.
이 닭장에 셋째누나가 병아리를 사와 닭이 되도록 길렀는데 할머니께서 잡아다가 날 몸보신 시켜주셨다..ㅋㅋㅋㅋㅋㅋ
수정맨션 옆에 있던 수정슈퍼 뒷문으로 통하는 입구이자 라동 입구.
수정슈퍼도 간판만 남아있고 이미 영업은 하지 않으셨다. 다만 슈퍼 사장님은 자리를 지키고 앉아계셨는데
젋으실 때도 윗 머리 숱이 없으시더니 지금 보니 완전히 대머리시다. ㅎ
정말 젋으신 분이셨는데...
학교가 끝나면 동네 애들 다 모아놓고 놀던 놀이터.
나동 202호 동일이, 동주 남매와 302호 창현이, 현수 형제, 403호 명규, 306호 원재, 수경이 누나 402호 은혜, 형채 형
가동 103호 무오, 경신이, 신유 형제, 206호 영도, 영욱이, 영우 형제..
다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의 아이들이 놀던 그 놀이터가 이제는 누구도 이용하지 않는 공간이 되어 잡초만 무성하게 자랐다.
이 놀이터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복받혀오르는 걸 참을 수가 없어 그 자리에 서서 많이 울었다.
놀이터 한가운데 있던 미끄럼틀은 왜 없어진걸까.
이 곳에 걸터 앉아 왕자와 거지게임을 했었다..
돌던지기 싸움을 할땐 이곳이 명당이었다 숨을수도 있고 작은 돌맹이도 많고..
그 옆의 나무는 말뚝박기를 할 때 기대던 나무였다.
놀이터로 오르는 계단..
나동 뒷편 주차장..
명절을 제외하곤 주차된 차들이 많지 않아 주로 '하루'라는 야구 비슷한 놀이를 했다,
오른쪽의 철판이 1루, 왼쪽의 가로등이 2루였다. 좁아서 3루는 없음.
위에서 두번째집이 우리가 살던 나동 401호.
저 다용도실을 통해서 친구들한테 장난감 같은 걸 던져줘서 받는 사람이 갖는 그런 요상한 짓도 많이 했다.
다동 입구.
김응용감독이 해태감독시절 이곳에 살았었다.
사인 해달라고 했는데 안 해주고 그냥 간 나쁜 사람이다. ㅡㅡ+
수정맨션에서 나와 조금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지원목욕탕.
소태동 2층집 살 때는 일요일마다 갔던 곳이다.
이날 땀을 너무 많이 흘려 오랫만에 목욕 좀 하고 갈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수정맨션으로 이사온 직후부터 서울로 이사가기 직전까지 다녔던 학운동 성당의 성모마리아 상.
예배당 내부는 거의 변함이 없었다. 좌우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그냥 창문으로 변했다는 것 빼곤.
예배당 내부를 좀 더 돌아다니며 사진 찍고 싶었지만 신도분들이 계셔서 포기했다.
많이는 아니지만 성당도 외형이 변한 것 같다.
이렇게 성당까지 살펴보고 바로 광주역으로 향해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처음 아침에 나올 때는 살던 동네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시간이 꽤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소태동 2층집과 학운동 수정맨션은 너무나 가까웠다.
서울로 오기전에는 어렸기 때문에 굉장히 넓고 멀어보였던 두 공간이 지금은 이곳 저곳을 둘러봐도 두시간이면 모두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내려가서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돌아보고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놓친 기억들도 많다.
더 늦기 전에 다시 내려가서 더 자세히 기록을 남기고 싶다.
어릴 때 살았던 동네를 혼자서 옛 생각을 하면서 걸었던 이번 여행은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
다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